[인터뷰] 에즈라 밀러 인터뷰 어나더 해피데이
[ Ezra Miller - Interview - Another Happy Day ]
2012년 1월 25일
(프랑스어-영어-한국어 중역=마음대로 해석한 부분이 많다)
<애프터스쿨> 속 트라우마를 겪는 학생이든, <에브리데이> 속 영화 내내 커밍아웃을 하는 어린 게이이든, <케빈에 대하여> 속 사이코패스이든, <어나더 해피 데이> 속 마약쟁이이든, 에즈라 밀러는 고통받는 미국의 외로운 청춘들을 잘 나타낸다.
그의 또래에서 이렇게 성숙한 20살을 찾아보기란 흔치 않은 일이다. 우리는 인터뷰를 통해 이 반항적인 태도 뒤에 숨겨진, 오페라, 베토벤, 헌터 S. 톰슨 그리고 미국 동부에 대한 그의 열정을 증명 받았다.
오페라 가수로서 처음 경력을 쌓았어요.
유치원에서 처음 음악 수업을 시작했을 때가 6살 정도였어요. 저희 선생님은 우리가 다들 흉터를 달고 사는 나이 때인데도 저희에게 오페라를 바로 가르치셨어요. 저는 금방 저를 사로잡은 그 장르에 바로 빠졌어요. 그래서 현대 무용수인 저희 어머니가 저를 한 달에 한 번 뉴욕의 메트로폴리안 오페라 단에 데려가셨죠. 2년 뒤에 어머니가 로버트 윌슨이 연출한, 필립 글래스의 <화이트 레이븐>이란 작품에 어린 아이 역을 위한 오디션이 있단 얘기를 들으셨어요. 가짜 달에 붙어서 소프라노를 부르는 동안 전 공중에 매달려있었어요! 그 역이 요구한 것은 오직 높은 곳을 무서워하지 않는 거였고,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죠. 새로운 세상에서 일하는 게 저에겐 마치 구세주 같았어요. 오페라는 우리 존재에게 굉장한 관점을 보여줘요. 저는 내가 오페라 가수가 되고 싶었다는 것을 바로 깨달았어요. MET가 두 시즌 후에 저를 어린 소프라노로 뽑았어요. 무소르그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와 푸치니의 <라 보엠>을 불렀던 게 기억나요. 하지만 가장 인상깊었던 기억은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커리어 말에 그와 함께 노래했던 거예요. 제가 성가대를 맡았던 <토스카> 작품이었어요.
하지만 목소리가 바껴서 소프라노로서의 경력은 끝나버렸죠...
거세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렇게 됐어야 했어요! 아직도 목소리가 바꼈던 순간이 기억나요. 하룻밤 사이에 저는 오페라를 포기해야 했죠. 그리고 엄청난 공허함을 느꼈어요. 저를 표현할 또 다른 예술을 찾아야했어요. 그래서 대학 연극 코스에 들어갔어요. 그래도 저는 노래도 계속 했고, 그건 제가 엘리자베스 스와도스의 뮤지컬 <Runaways>를 하도록 밀어줬어요. 어느 날 저녁에 무대 뒷편에서 어떤 분이 오셔서는 영화를 만들자는 제안을 했어요. 저는 13살이었고 많은 대본을 받았지만 가슴이 찌릿하진 않았어요; 1년 뒤에 제가 <애프터스쿨>에 들어가기 전까지는요. 로버트란 캐릭터는 새로운 미디어에 둔감해지는 것에 대항해요. 제 세대가 홀로 견뎌내는 것들이죠. 15살에, 그는 이미 너무 많은 걸 봤고, 그것들을 자기 인생에 반영시키려 해요. 이 영화는 픽션과 현실의 경계라는 이슈를 키워낸 거라 할 수 있죠.
<비웨어 더 곤조>(프랑스 미개봉작)에서 당신이 연기한 곤조라는 언론인의 모습 또한 정확히 그랬어요. 이런 서술의 창시자였던 헌터 S. 톰슨은 포크너의 이런 말로 지칭되곤 해요: "픽션은 종종 최고의 진실이기도 하다."
본래 진실은 한 사람이 살아가는 주관적인 경험을 반영하지 않아요.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은 드라마로 채워진 사건이죠. 그냥 가게에서 돌아오는 것도 어떤 사람에겐 그 자체로서 여행이 될 수도 있어요. 가장 중요한 건 감상이에요. 그 부분에 있어서 전 포크너와 헌터 S. 톰슨의 생각에 동의해요. 우린 모든 예술 형식에서 이런 컨셉을 찾아내는 거예요.
<애프터스쿨>은 당신이 장편 영화에 내딛은 첫 걸음이죠, 안토니오 캠포스와 마이클 스털버그가 참여했어요.
모두 첫경험이었기 때문에 함께 할 수 있었어요. 제 캐릭터인 로버트는 촬영하는 동안 계속 바뀌었어요, 다들 그에 대해 알아가려는 것처럼요. 저는 캐릭터를 따라가면서 모든 촬영 과정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볼 수 있었죠.
사람들이 그러던데 학교를 중퇴했다면서요... 베토벤 무리가 나오는 꿈을 꾸고 나서요!
그걸 보도한 기자가 약간 과장했네요! 실은 이래요: 제가 <애프터스쿨>로 베를린 영화제에서 바로 돌아왔을 때였어요. 돌아오니까 학교 수업을 몇 개 놓쳤더라고요. 많은 선생님들은 저를 원하셨지만 다른 학생들은 제가 그들이 한 만큼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거에 질투를 했어요. 그래서 저는 이런 환경 속의 제 위치를 조금 빨리 알아차렸고, 결국엔 제가 배울 것이 많이 없는 곳에 대한 반항심을 느꼈어요. 이런 학업 모델은 저에게 맞지 않았죠. 어느날 저녁, 저는 패닉 발작에 빠진 베토벤을 지하철에서 만나는 꿈을 꿨어요. 베토벤은 그의 초기 교향곡 4곡에 만족하지 못했고 저는 그에게 확신을 주려고 했어요. 그러다 우리는 좀비 같은 것들에게 공격을 받았고 보호하기 위해서 함께 뭉쳐야 했죠. 깨어났을 때, 저는 제가 학업을 중단해야한다는 걸 깨달았어요(웃음)
<애프터스쿨> 이후에는 앤디 가르시아와 <시티 아일랜드>를 찍었어요.
<애프터스쿨> 이후에 1년 조금 지났을 때예요. 앤디 가르시아는 정말 놀라운 배우예요. 그분과 정치적인 대화를 주고받을 멋진 기회가 있었는데, 흔한 일은 아니었죠. 예를 들어서 저는 쿠바에 대해서 아주 급진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분이 영화 촬영이 끝날 때 자기 조국의 역사에 대한 책을 주기도 하셨어요.
그 다음 영화였던 <케빈에 대하여>의 존 C. 라일리보다 더 나은 아버지였나요?
제가 영화 속에서 만난 모든 부모님들 모두가 저에게 아주 친절했고 영화의 마법에 대해 알려주셨어요. 비교하는 건 불가능해요, 어떤 경우에서라도 그렇게 하기란 어려운 일일 거예요. 하지만 앤디 가르시아는 저를 그의 날개 밑에 품어줬어요. 그의 조언은 오늘까지도 항상 저에게 도움이 돼요. 그리고 저에게 시간을 줬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틀을 깨라"는 거예요. 같은 방식으로 경기를 치르지 말고 계속해서 새로운 걸 하라고요; 지금 찍는 영화에서는 실생활에서든요. 여러 개의 상황에서 같은 감정을 재현하는 건 어려운 일이에요.
감정적인 면에 있어서, <케빈에 대하여>에서 마지막에 틸다 스윈튼과 마주보는 장면 말이에요, 촬영하기 힘들었나요?
그 시퀀스가 이 영화에서 우리가 했던 작업의 정점이었어요. 마지막을 고대하고 있었는데, 제가 머리를 완전히 밀어야 했거든요. 영화상 처음으로 케빈의 가면이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게 되는 순간이죠. 케빈은 진실을 알고 있어요. 사춘기를 거치면서, 우리 모두는 모든 것이 흑백인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 익숙해졌어요. 케빈은 18번째 생일에 가까워졌을 때 그의 실수를 마침내 깨달아요. 케빈은 자기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얘기했지만, 저는 걔가 아주 잘 알고 있다고 확신해요. 케빈은 그냥 자기 어머니와 진실된 커뮤니케이션을 하길 원했던 거예요; 그게 아이러닉하게도 그가 끝을 보게 만들었죠.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가 저지른 학살 사건에 대해 들었을 때 어땠어요?
어느 정도 같은 특성으로 이해하면서, 그가 왜 그 테러를 저지렀는지 이해하려고 했어요. 제가 했던 첫번째 중 하나는 그의 가족사를 아는 거였어요. 그의 아버지가 그가 어렸을 때 일찍 떠났다는 걸 알게 됐죠. 브레이비크는 정치적 그리고 사회경제적 주제에 기초한 모든 성명서를 계속 썼어요. 그런 접근을 넘어서, 우리는 그것의 감정적 혐오가 어디서 왔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어요. 그것은 아마 그의 가족사에서 왔을 거예요. 케빈의 경우와 같은 관점이죠: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어요.
<케빈에 대하여> 전, 그리고 <시티 아일랜드> 이후에 <에브리데이>에서 아버지와 갈등을 겪는 어린 게이 청소년 역을 연기했어요. 그 역할은 어떻게 준비했나요?
음, 우리는 인간의 섹슈얼리티에서 모든 형태를 찾을 수 있고, 그것은 그가 마음이 가는 모든 유형을 넘어설 수 있어요. 제가 연기를 할 때 그런 특징은 작은 부분이에요, 왜냐하면 그의 개성은 단순히 그의 섹슈얼리티로 정해지지 않을 거거든요. <에브리데이>와 곧 나올 <월플라워>에서 제가 연기한 두 명의 게이 캐릭터는 정말 완전히 달라요. 그들이 가진 유일한 공통점은 그들이 자신이 무엇인가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는 거죠. 호모섹슈얼리티는 청소년 시기에 그들의 존재라는 중요한 순간 그 이상의 것을 나타내줘요.
하지만 이 캐릭터들은 꽤 진보적인 세상에서 발전해서 미국이나 다른 곳에선 꼭 필요한 케이스는 아니죠.
미국 사회는 모순과 위선 덩어리에 근간을 두고 있어요. 다른 어떤 문화보다도 더 성과 마약, 폭행에 관련된 모든 것에 사로잡혀 있죠. 이런 청교도주의가 왜 여기에 억제가 많은지를 말해줘요. 우리는 인간이 스스로의 존재와 스스로의 욕망을 억누르는 것처럼 보이는 지점에 와있어요. 당신이 독립된 배아세포라면, 기생충이 되는 것보다는 더 낫고 진화될 게 확실하단 건 과학적인 사실이에요. 그걸 우리의 성향을 유일하게 반영하는 것, 소위 말하는 기형이라고 하는 건 억압이죠.
프랑스에서도 같은 문제를 겪고 있어요. 예를 들자면 우리 정책 중 최근 미약한 약물 규제에 대한 논쟁이 있었거든요.
이상적으로는 모든 걸 불법이라고 해야겠죠. 인생 그 자체는 거의 모든 약들로 구성됐어요. 받아들여져야 하는 건 그것이 만들어지는 용도예요. 불법적인 것을 맞닥들이는 순간부터 마약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어떤 미약한 마약들은 날마다 쓰여서 합법화가 될 거예요. 게다가 그 질을 감독하는 과정도 이뤄질 거고, 건강에 훨씬 덜 해로워질 거예요.
<어나더 해피 데이>에서 우디 앨런의 어두운 영화에서나 볼 법한 중독자를 연기했어요.
(웃음) 맞아요. 서로에게 아주 다양한 노이로제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는 게 똑같죠. 무슨 얘길 하시는 지 알겠어요. 이 영화는 다시 돌아오기도 힘드들었고 완전히 감정에 빠져있었어요, 메릴랜드에서 20일동안 촬영했거든요.
메릴랜드, 뉴저지 뉴욕 같은 미국 동부에 아주 매력을 느낀 것처럼 보여요.
맞아요! <캘리포니케이션>을 찍을 때에만 서부 쪽으로 갔었어요. 제 영화는 주로 미국 동부에서, 큰 도시보다는 교외에서 더 많이 찍었어요. 자라기도 거기서 자랐고요. 이 지역에서 나타나는 "악마들"을 스크린에서 다시 만들어 낼 수도 있었어요(웃음). 동부는 늘 서부에서 즐길 수 있는 것도 가능한 저의 집이 될 거예요. 하지만 몇 가지 불가능한 것도 있죠: 사람들이 그들이 필요없을 때는 쉴 수 있다는 걸 믿고 싶어 하는 거요. 뉴요커는 캘리포니아 사람들이랑 반대로 항상 불안함에 불평하잖아요.
지역이 <어나더 해피 데이>에서처럼 가족들의 갈등 요소가 될 수 있을까요?
저는 특별히 지역적인 요소는 찾아내지 못했지만 흥미로운 질문이네요. 물론, 지역도 이 사람들의 불행에 연관이 있죠. 마지막에 우리를 특징 짓는 부분이 많거든요. 죽음을 마주한 여성과의 맺어온 관계를 지켜봐야만 하죠.
브라이언 데니히, 엘렌 버스틴, 그리고 조지 케네디 같은 대배우들과 연기할 기회를 얻기도 했어요. 그들에게서 어떤 걸 배웠나요?
이 사업에 오래 있었던 만큼 문제를 잘 돌파해온 이 연기자들에게 매료됐어요. 그분들과 함께 여행하는 건 한 작품의 완벽한 마무리를 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장인들을 보는 거 같았죠. 그 세 배우의 연기와 그들의 내적 감수성은 서로 일치해요. 또다른 공통점은 그들이 새로운 세대에서는 볼 수 없는 군기가 있었어요. <어나더 해피 데이> 세트장에서 엘렌 버스틴과 조지 케네디는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카라밴이나 식당으로 달려가는 반면에 다음 단계를 위해 기다리고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었죠.
<케빈에 대하여> 얘기로 돌아가서, 맡은 캐릭터를 위해서 프로코피에프의 <전쟁과 평화(War and Peace)> 오페라를 들었다고 했는데, 그게 당신이 멤버인 인디 밴드 Sons of an Illustrious Father의 음악과는 거리가 있던걸요.
그래도요! 오페라 <디도와 아이네이아스>의 마지막 순간을 연출한다고 상상해봐요; 마치 오페라가 그곳에서 펼쳐지는 거 같죠! 제가 하는 모든 것들은 그 장르를 멤돌고 있어요. 영화에서 오페라의 감성을 옮겨내려고도 하고 있고요.
그래서 당신은 러시아 어로, 이탈리아 어로 노래해오고, 심지어 당신 밴드에서는 Sanskrit로도 작곡했더라고요. (역: Sanskrit 꼭 들어보세요 이 포스트 끝에 좋아하는 영상 같이 올릴게요)
산스크리트는 고대 인도말이에요. 만트라라고 불리는 거랑 같은 건데요. 성가대가 노래에서 같은 음절을 반복하는 이유가 이거예요. 모든 것은 시작, 중간, 그리고 끝을 가지고 있어요: 이 언어는 모든 것의 본성을 상징화해요. 저는 이 음악을 제가 "감정적 고통"에 완전히 빠져있었던 힘든 시기에 썼어요. 우리가 이 언어들로 노래할 때 삶의 현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어려움을 겪게 되죠.
다음에 같이 일하고 싶은 감독 있어요? <케빈에 대하여> 이후에는, 예를 들면, 구스 반 산트 감독도 생각해볼 수 있겠네요.
<레스트리스> 오디션 장에서 뵀었어요. 감독님이 자기 영화 몇 편에서 보여줬던 스타일과 시각을 좋아해요. 원하는 대로 완벽하게 시각화할 수 있도록 하는 훌륭한 감독들 중 한 분이시죠. 하지만 그 제대로 된 <엘리펀트>는 제게 알란 클락으로 남았어요. 대단한 영화예요!
이 인터뷰는 2012년 1월 2일 파리에서 이루워졌고, 에드워드 브랜이 영어로 한 것을 번역한 것입니다(역: 그럼 나는 영어-불어-영어-한국어로 번역한 셈이네...ㅎ)
인터뷰에서 Sanskrit 얘기 나온 김에 같이 올리는 라이브 영상
post-future 나오기 전에 Sons 곡 중에 제일 좋아하던 노래이며
그 노래 공연 영상 중에 가장 좋아하는 영상이다
분위기 너무 예술적이어서 정말 작품 보는 기분이고요
다섯 명일 때의 Sons이고 이 영상이 2010년 9월에 올라왔으니까 에즈라 겨우 17살 때쯤일 거다
근데 이미 벌써 너무나도 예술가의 모습이죠
3분 20초 이후부터는 더 멋지다
인터뷰 얘기도 해야지 케빈 마지막 장면 얘기해준 거 너무 좋았다. 케빈은 자기가 한 행동의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지만 사실 잘 알고 있었을 거라는 거. 모든 것이 명쾌해지는 기분이었다. 이게 맞는 거라고, 이렇게 해야 마땅하다고 저지른 짓이었지만 결국 그게 완전히 잘못된 행동이었고 되돌릴 수도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지만 그걸 그 자존심 높은 케빈이 어떻게 에바에게 털어놓을 수 있겠어. 그냥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틀렸네'가 아니라 '지금은 잘 모르겠어' 정도로 밖에는 얘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 케빈 보면서 막히던 부분들 에즈라 인터뷰 보면서 제대로 이해하게 되는 거 같다. 캐릭터 해석 너무 잘하는 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