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risky Q&A: Ezra Miller, Star Of “We Need To Talk About Kevin” ]


2012년 1월 23일


(의역 정말 많이 함)




나는 확실히 어떤 식으로든 내가 보는 대부분의 영화를 즐기는 사람들 중 하나다. 하지만 단기간 내에 그 영화를 두 번 보고 싶을 정도로 감명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그런 영화 중 하나가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동명 소설을 기반으로 한 <케빈에 대하여>였다. 이 영화는 끝내 교내 사격 사건으로 선생님과 동급생들을 학살한 케빈이라는 아들을 키우는 자신의 경험을 되돌아보는 어머니(틸다 스윈튼)의 시각으로 이야기 된다. 스윈튼의 캐릭터 에바는 케빈의 범죄 이후 그녀의 삶에 남겨진 것들을 마주하는 현재와 케빈의 양육을 되돌아보는 과거 두 형태로 보여진다. 이 영화는 아주 깊은 감동을 주면서도 오싹하고, 훌륭하고 복잡한 책을 성공적으로 충실하게 각색했다. 대배우에게서 으레 기대하듯이, 스윈튼이 환상적이지만 나는 이 잔혹한 일을 저지르고만 청소년, 케빈을 연기한 에즈라 밀러에게도 똑같이 감명 받았다. 


열아홉의 밀러와 (현재 전국에서 개봉 중인) <케빈에 대하여>, 그가 그 캐릭터에 실제로 동질감을 느낀 방법, 사회가 모성애를 바라보는 방법, 그리고 보통 하는 연기에 관해 인터뷰를 하는 건 큰 행운이었다. 나는 그의 지성에 아주 감명 받았고, 그가 가진 생각은 내가 이 영화를 정말 세 번 보고 싶다는 수준으로까지 영화의 인상을 높이는 정도임을 알아차렸다. 바로 다음에서 우리의 Q&A를 확인해보라.


케빈 연기에 있어 제게 가장 중요했던 것 중 하나는 그가 단순히 "괴물"일 수는 없다는 점이었어요 ─ 관객들은 케빈에게 홀려야 했고 저는 당신이 이 역할 속에서 아주 매혹적이라고 느꼈어요.


와, 정말 좋은데요! 네, 확실히 그걸 바랐었죠. 제가 스크립트를 읽었을 때, 저는 곧장 이렇게 이해했어요, 이 영화가 가장 효과적일 수 있는 방법은 케빈의 관점이 억지인지 아닌지, 그리고 관객들이 케빈으로 인해 나타나는 순간순간의 도덕적 몰락 상황 속에서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을지의 여부라고요.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들을 떨어뜨려 놓는 건 그들에게 죄를 묻는 것과 비슷하죠.  어떤 것보다 제가 가장 원한 건 케빈의 감정을 아주 확실하게 믿고, 실제론 관객들이 압도 당하는 그의 머리 속을 이해하는 거였어요. 


제가 케빈이 그의 목적을 피하려고 한다고 느꼈던 순간들은 별로 없었어요. 케빈은 그가 누구이고, 그가 해내고 싶은 건 뭔지, 그리고 그가 믿는 것에 대해 레이저처럼 또렷하게 집중하고, 당신이 그걸 정말로 잘 보여줬다고 생각했어요. 그걸 고려했을 때, 당신이 다른 인터뷰에서 케빈과 자신은 닮았다고 했던 게 의아하더라고요, 무슨 뜻이었죠?


저한테 케빈은 자신의 행동을 위한 그의 지적 정당화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반면, 케빈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것만큼 그의 심리 속엔 존재하지 않는, 그런 더 심오하고 더 근본적인 수준에서 일어나는 뭔가가 있어요, 그리고 그의 신체, 그러니까 그의 심리적인 신체가 바로 기본의 끝이죠. 그건 어머니의 애정에 대한 갈망이고, 우리는 모두 그렇게 설명될 수 있어요. 우리는 모두 한때 어린 아이였고, 우리의 자연스러운 충동은, 알다시피, 우리의 보호자로부터 관심을 끌기 위해 발악하는 이중나선의 DNA로 쓰여있어요. 


그러니 기본적으로 저를 케빈과 동일시하는 건 그 관심이 거부됐을 때 일어날 일을 상상해보는 일이죠. 저는 아주 세심하고 아주 배려있는 어머니로부터 거부 받았던 순간을 떠올릴 수 있고, 그 내면 속 감정의 확실한 분노도 떠올릴 수 있어요. 저는 아이들이 우리가 가진 타고난 권리를 거절 당했을 때의 생각과 나를 동일시한다고 느껴요, 그 권리란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것으로 영양실조, 왜곡, 그리고 결국엔 가장 응축된 형태의 분노를 이끌어내죠, 우리의 생존 본능이라고 나타나는 분노로 말이에요. 아마 정말 화가 나고, 정말 가만히 있지 못하게 되고, 정말 적개심을 드러내게 될 거예요. 왜냐하면 한때 그 적개심은 우리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지구의 다른 생명체를 죽이기 위해, 식량을 사냥하기 위해, 그런 것들을 위해서 우리가 필요로 했거든요. 그러니 이건 일반적인 사람들의 수준에서 케빈과 저를 동일시하는 거예요. 케빈의 생각, 케빈의 목표나 케빈이 하는 행동들과 동일시 할 필요는 없고요.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본질적인 인간 동기와는 사실 꽤 거리가 있는 거라서요. 


케빈은 어떤 수준에선 소시오패스로 태어난 걸까요? 하지만 그 반사회적 행동은 그가 양육 받은 방식 때문에 그런 방향으로 설정되는 거잖아요? 그럼 그의 본성은 소시오패스로 태어난 그와 어머니에게서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그의 환경이 만들어 낸 결과물의 조합일까요? 


저는 이걸 고지능이라고 봤지 소시오패스라고 보지는 않았어요. 그러니까 케빈이 어머니와 자신 사이의 감정적/사회적 환경을 아주 잘 이해하게끔 만들어주는, 한 아이의 머리에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예리한 그 지성에 뭔가가 있는 거죠. 전 소시오패스는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공감의 부족함을 뭉뚱그려 둘러싼, 하나의 아주 큰 컨셉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저는 케빈은 인간적인 공감 능력을 가졌다고 봤어요, 날카롭고 예리한 지성과 어린 나이에겐 과한 인식 능력을 가만히 놀리고 있진 않는 거죠. 


이 영화가 제시한 가장 흥미로운 질문 중 하나는 케빈의 어머니인 에바(영화에서 틸다 스윈튼이 연기)가 케빈이 그렇게 된 것에 책임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얼마나 비난할 수 있는가예요. 이 책/영화는 사회가 모성과 어머니가 되는 여성들을 바라보는 방법, 여성이 그 역할 속에 자신을 바라보는 법─당신은 타고나길 그걸 원해야 해,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다니 애를 망쳐먹을 셈이야?─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제 개인적인 의견으론, 그러니까 저만의 감정적인 관점에서는, 영화랑 상관 없이요, 우리는 이 사회에서 인간 행동에 관한 현실적이지 않은 기준을 붙잡고 있어요. 그 자체만으로도 문제이지만 그게 이끌어내는 연쇄반응이 있거든요. 어머니가 내면적으로 감정적인 기준, 이를테면, 자신 안에서 자라나고 있는 이 아이를 사랑할 마음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이미 그녀는 사회적 협약과 대립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게 아주 기초적인, 초기 단계여도,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협의를 하거나 대처할 수 있는 협상이 그녀에겐 부족해요. 이건 길고 긴 임신기가 지난 후에는 오히려 되돌릴 가 없는 과정이란 걸 의미하죠. 그럼 그 때엔, 이해 받거나 말을 할 방법이 없는 사람들이 생겨요─저는 이게 가장 위험하고 가장 끔찍한 시나리오처럼 느껴져요. 인간 행동에 대해 이런 현실적이지 않은 기준을 유지하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는, 사람들은 무언가 그 과정에서 살짝 벗어날 때, 무언가 사전협의된 트랙에서 탈선하였을 때에도 표현을 못해요.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런 감정들을] 공개적으로 의논할 수 없는 사악한 악순환에 놓여있는 것이고, 그건 필연적으로 그 환경을 발전시킬 스스로를 내면적으로 더 힘들게 만들어요. 


어머니가 자신이 이 유기체에 그 즉시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해도 그게 죄라거나 나쁜 짓은 아니에요, 그 유기체는 그 순간 전까지는 그녀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고, 알지도 못했고, 분명히 그녀에게서 인생의 많은 부분을 앗아갈 거예요, 자연스러운 일이죠. 그건 잘못된 일이 아니에요. [그런 기분을 느낄 때] 그녀가 지원을 받을 수 있고 그걸 논의하고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때는 그녀도 자신의 아이를 사랑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이나 대안책을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죠. 제 생각엔 어떻게든 혹은 다른 방법으로든, 모든 인간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게 언제나 가능할 거 같아요; 가장 극단적인 상황에서라도, 이 행성의 모든 사람들에 관계없이 자연스럽고 공감적인 결속이 있어요. 우리는 타고나길 통하도록 만들어졌지만, 사실은 어린 아이들에게 있어 행복한 나날을 느끼지 못하는 초기의 충동에 대한 협의나 이해가 없다면, 당신은 이미 이 사회 속에 답보 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은 금기에 묶여있고, 그 금기란 당신을 고립시키기만 하고, 아이들을 향한 경멸이나 혐오라는 당신의 상황만이 발전해 가는 공간 속에 당신을 밀어넣을 거예요. 그건 약간 그 자체만으로도 금기의 전형적인 위험성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그런 것들을 없애고 산 채로 태워버려야 해요. 


또 영화가 흘러가는 동안 당신은 에바가 자신의 걱정을 얘기하려고, 특히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축하는 케빈의 아버지에게 얘기하려는 걸 확실히 알고 있어요. 에바는 그 감정을 해결하는 데 있어 아주 외로워 하고, 그 아이에 대해 가진 감정이 별로 없어요.


비극을 위한 레시피죠. 어떤 환경에 고립되어 있는 건 항상 나쁜 방향으로 향해요,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고 우리가 어떤 문제를 해결하거나  우리의 투쟁에서 어떤 특정한 지표로 나아가는 방법은 협력을 통해 함께 하게 되는 것이잖아요. 저는 항상 프랭클린[에바의 남편이자 케빈의 아버지로, 존 C. 라일리가 연기함]은 사회의 시각을 풍자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인식했어요. 그게 바로 우리가 이것을 바라보는 방법이죠. 영화는, 많은 언어를 사용할 수 없었고, 어떤 나레이션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각본을 쓰고 책에서 한 여성이 어떤 독백을 하는지 잡아 내고, 그걸 이미지와 상징으로 나타 냈다는 게 이것의 큰 성공적인 부분 중 하나예요. 그런 점에서 저는 이 영화가 어떻게 보면 괜찮은 우화적 수준에서 이뤄진 것 같아요. 각 캐릭터 또한 잘 상징화 됐고요.


영화 시작 하기 전에 책 읽었나요?


좀 어이없게 들리겠지만, 이게 사실이에요 ─ 훑어봤어요. 책을 훑어봤는데 일부러 그랬어요, 왜냐면 에바의 시각에 대해서 그렇게 내면까지 완벽하게 이해하고 싶진 않았거든요. 캐릭터로서 케빈이 가진 엄청나게 많은 갈등과 엄청나게 많은 긴장은 그의 어머니가 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내려 하고 있어요. 어머니가 다음에 뭘 할 거 같은지 알아내려 하고, 그들 사이에서 결국 벌어질 전투나 전쟁에 대해 대비하려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책을 정말 좀 드문드문 읽었고, 아주 작은 부분들만 읽었어요, 캐릭터에 대해 알려주는 부분들이요, 책에서 (이 일을) 다시 생각해보면서 드러나는 에바의 생각들에 대해 완전히, 전지전능하게 이해하는 건 뺐죠. (역: 책은 에바가 모든 일이 지난 후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회상하는 식으로, 사건의 영향을 받은 에바의 시선으로만 서술 됨)


음, 그게 바로 에바가 조금은 신뢰할 수 없는 나레이터인 이유군요. 우리는 케빈이 그 범죄로 수감된 후, 이것을 되돌아보는 그녀의 시각이 얼마나 왜곡 돼 있는지 몰라요. 그녀가 바라보는 방식은 그녀만의 편집증과 그 일에 대한 그녀만의 죄책감과 책임으로서 전해지죠.


맞아요. 사실 마지막 장면을 빼고는 제가 나오는 각 장면의 꽤 많은 부분이 실제 인물이 아니라 꿈과 기억 속의 존재를 연기하고 있는 저예요.


저는 이 영화를 보는 게 산아제한 정책의 하나일 수도 있다는 농담을 해요, 왜냐하면 이게 모든 미래의 부모들에게 당신들의 아이는 "나쁘게" 변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높여준다고 생각하거든요. 어쩌면 그 아이들이 케빈처럼 변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들을 닮거나 예뻐보이지도 않고, 혹은 그들이 그럴 거라고 생각했던 것만큼 아이들에게 든든하고 애정이 담긴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죠. 에즈라 씨가 아직 많이 어리고, 아마 여기에 대해 아직은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건 알지만, 이 영화를 찍음으로써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해 제대로 고민하게 되지 않았나요? 소름끼치지 않았어요?


음, 이건 저를 그 깨달음이라는 건강한 과정으로 이끌었어요. 그 깨달음이란 아이의 양육한다는 게 의도됐고 확실한 것이길 우리가 정말 바란다는 거죠. 우리는 그 평생의 고통을 정해진 목적의식과 이것이 의미하는 것, 잠재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완전한 이해로 이뤄내고 싶어해요, 이게 전부죠. 어느 정도 대비를 해두는 수준은 되고 싶어 하잖아요. 


하지만 한편으론 지금 세상은 더 많은 사람을 원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해요. 우리는 70억 명이고 계속 늘어나고 있으며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자원관리 시스템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 더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진 않은 거 같아요, 필요로 느껴지는 건 확실히 의도된 근거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죠, 이해되세요? 언젠가는 어떤 미친 가족 상황이든지, 그들이 정말로 그런 것처럼, 자신의 손가락 끝에서 세상의 모든 가능성을 가졌다고 느낄 수 있는 아이들을 키우게 될 수도 있다는 기초를 형성할 수 있다고 믿고 싶어요. 그 사람들은 절 미워할 수도 있고, 제가 지지하는 모든 것을 거부할 수도 있고, 저랑은 완전히 다르고, 그걸 받아들이고 심지어 지지하기 위해서 저는 그런 확실한 의도를 가지고 싶어요. "그래요, 날 미워하세요. 좋아요. 그거 정말 괜찮은 인간 관점이네요. 왜 저를 싫어하는지 얘기해볼까요?" 아시겠죠? 그게 양육의 현실이에요. 모든 아이들이 언젠가는 자신의 부모님을 싫어해요, 그러니 부모님이 임신이나 출산 아니면 뭐가 됐든 그 모든 여정 내내 애정이 깃든 행복한 관계이길 바란다면, 그 사람들은 아마 아이를 가지지 말아야 할 거예요. 그리고 그런 점에서, 저는 모든 형식의 피임에 찬성해요. [웃음] 특히 예술적인 피임이요.


영화는 확실히 관객들에게 그에 대한 경각심을 주는 훌륭한 성과를 거뒀어요, 하지만 당신의 아이가 케빈처럼 될 수 있다거나 그 아이들이 항상 기쁨을 주지만은 않을 거라는 확률은 희박할 수도 있어요.


인간이 견뎌낼 수 있는 가장 힘든 상황은 죄다 아이를 가짐으로써 시작된다고 느껴요. 그건 아이를 낳기로 결심하기 전에 심각하게 고민하고서 마음을 편안하게 먹도록 하기 위함이에요. 


그럼, 음, 역대 가장 뛰어나고 유니크한 배우 틸다 스윈튼과 작업하는 건 어땠나요?


[기쁨의 신음] 대단했어요. 대단했다고요! 배움이 된 경험을 말하자면, 마치 <매트릭스>의 네오가 그의 눈을 감았다 뜨면서 "나는 쿵푸를 할 줄 알아"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왜냐면 그냥... 그냥 틸다 옆에 있으면, 그녀가 하고 있는 걸 정말로 보진 못해도, 그녀가 하고 있는 걸 느낄 수는 있어요. 그건 마치 제가 한번도 받아보지 못한, 가장 귀중한 레슨 같았어요. 장면에 각각의 독특하고 세밀한 비트를 넣는 틸다를 느끼려면 그녀의 연기가 필요해요, 그러니까, 제대로 해냈을 땐 정말 마법처럼 느껴질 뿐이에요. 멀린과 같이 놀게 된 동네 장난꾸러기가 된 거 같았어요. 불행히도, 이건 제가 많이 들어 본 질문이어서, 거기에 대해 제가 말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요, 개인적인 모습으로서, 한 인간으로서의 그녀는 누구인가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고 예술가로서 그녀가 하는 것 또한 표현하기가 불가능한 거 같아요. 저는 여러 번 이 감격스러운 상황 속에 있는 저를 느껴왔어요, 왜냐하면 틸다는 인생의 모든 훌륭하고 가치있는 것을 가진 것처럼 형용할 수가 없거든요. 어떤 언어나 표현도 죄다 거부하죠.


무슨 장면이 촬영하기 제일 힘들었어요?


있죠 ... 장면마다 다른 방식으로 어려웠어요. 케빈의 특성을 찾아내는 배우로서는 마지막 장면에 가장 많은 연구와 가장 많은 생각과 고민이 필요했어요. 케빈도 찾기 힘든 그 특성 속 공간을 어떻게 찾아내는지 집중하는데 시간이 가장 많이 걸렸죠. 


그래도 한편으론, 그냥 한 사람으로서의 제 입장으론, 내가 사람을 죽이고 있었다는 지독한 생각으로 계속 활을 쏘는 거? 그리고 속으로 그런 상황을 계속해서 키워가고 있었더니 정말로 약간, 환각을 느끼는 것 같던 순간이 있었어요. 정말 짧은 컷으로만 나오는 장면인데 촬영은 좀 여러 번 했거든요. 마른 벽에다 20발 정도의 활을 쐈는데, 마지막엔 그 죽어가는 아이들이 보이더라고요. ... 음, 바닥에서 꿈틀대는 것처럼요. 그 정도쯤 되니까 힘들었어요, 저 사람들이 컷이라고 외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결국엔 세트장을 뛰쳐나가서 잠시동안 울어야 했죠. 현실이 작품과 합쳐져서 갑자기 내가 누군가를 죽였다는 아주 강렬한 감정을 느꼈어요. 제가 그런 건 아니지만... 그렇게 한 거예요. You know? 정말 묘한 일이에요. 어떤 걸 정말 많이 상상하게 되면, 현실에서도 같은 일이 있었던 것처럼 느껴지니까요.


얼마나 깊이 빠졌길래...


그게 바로 예술 형식의 아름다움이지만, 예술 형식의 위험성과 경고이기도 하죠. 


다음에 나올 영화 <월플라워> 얘기를 하죠.


이 작품의 마법이 어떤 식으로든, 아슬아슬하더라도, 피츠버그에 있는 이 아이들과 함께하는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추억이란 마법을 보여주는 거라면, 잘 될 거에요. 환상적이겠죠.


영화속 당신의 캐릭터는 더 어리고 더 순수한 타입의 소년에게 섹스와 마약을 처음 접하게 해주는 형이죠 ─ 그럼 당신에게 그걸 알려준 사람은 누구예요?


재밌네요 ... 처음 고등학교 들어갔을 때, 내가 신입생 때 그랬던 선배 무리가 있었어요. 그들은 저를 온갖 악의 심연으로, 10대의 사회적 존재감 영역으로(어른들의 사회적 존재감을 향한 도입부예요) 데려가 준 저의 가디언들이었어죠. 그 선배들은 자신들만의 권리로 모두 예술가였고, 저를 아주 어린 애처럼 보면서도 제가 인생에서 예술을 좇고 있다는 점에서 동등한 수준으로 생각해줬어요. 저한테 몇 가지 가치있는 팁을 주기도 했죠.


그들 중 한 명이었던 매기 왓츠가 실제로 이 책 <월플라워>를 제게 알려줬어요. 완벽한 순환 같죠. 그때는 제가 이 책의 주인공, 찰리의 입장이었어요, 그 영역에 이제 막 들어가서 어떻게 잘 참여할 수 있는지 알아내려고 하는 막내. 그런 뒤에 저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던 매기, 그리고 제 첫 번째 여자친구였던 에스더가 저한테 이 책을 소개해줬어요, 그런 뒤 딱 4년 뒤에, 제가 그들의 역할이었던 것을 마침내 수행하기 위해 그 각본을 받은 거예요. 믿기 어려운 난해한 예술/인생의 순환고리에 대해 얘기하고 싶으면, 분명 이게 바로 그중 하나예요.


그 친구들이랑은 계속 연락해요? 영화판에 들어가게 됐다고 얘기했어요?


오 네, 당연하죠. 다들 제가 영화에서 패트릭이라는 게 정말 즐겁고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우리 모두에게 정말 짜릿한 일이에요.


나중엔 어떤 걸 연기하고 싶어요? 더 많은 예산의 작품에 관심이 있나요, 아니면 인디 영화하는 게 좋아요?


그 내용이 진실된 감정을 울릴 수 있는 영화를 하는게 정말 좋아요; 제가 각본을 읽을 때와 그걸 만들어가는 경험 내내 마치 가슴 속에서 이야기의 진실이 공명항하는 걸 느끼는 영화요. 그게 제가 관심 가는 거예요. 예산의 범위나 어떤 캐릭터인지, 영화의 장르가 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저한테는 기다리는 것도 즐겁고, 잠시동안 일을 하지 않는 것도 즐거워요, 아니면 작업하는 내내 제가 그 일을 계속 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게 뭐든지 간에 ─ 지금 이렇게 이런 거에 대해 누군가한테 애기하려는 순간까지 ─ 그건 그 이야기가 진실의 종을 가지고 있다거나 그 길을 따라 있는 진정한 본능 어딘가를 건드리는 파급효과가 있다고 느껴져요. 왜나면 그렇지 않을 때는 제가 사랑하는 예술 형태가 아니거든요, 이해되시죠? 나쁜 영화는 영화가 아니에요. 그건 Wonerbread죠. 양분이 없으면 그 물질도 없어요,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양상추랑 똑같아요.






오랜만에 길고 어려운 인터뷰였는데 그만큼 새로운 내용도 있어서 좋았다

에바 시점으로 적힌 책이라 일부러 훑어보기만 했다는 거,

강당씬 촬영하다가 환영도 보고 결국 울기까지 했다는 거...

케빈 관련 일화들은 들을 때마다 감탄 밖에 안 나오네

Posted by duck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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