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화보] '에즈라밀러에 대하여' 뉴욕 매거진
Ezra Miller/인터뷰 2015. 11. 13. 02:45 |[ We Need to Talk About Ezra ]
에즈라 밀러는 사회화 문제를 겪는 청소년을 아주 잘 연기한다.
2012년 1월 9일
큰 키에, 창백한 피부, 치렁치렁한 머리의 젊은 베짱이가 웨스트 20번가 더 하이라인 아래에 있다. 다른 사람들의 꿈과 희망을 가볍게 살펴보고, 담배를 피면서. 2년 전, '어나더 해피데이'와 '케빈에 대하여'에서 두 차례 그를 증명해보였을 때, 에즈라 밀러는 그럴듯한 비뚤어진 청소년이었다. 그는 뱀파이어의 안색과 뼈대를 가지고 있다. 19살 때에는, 여드름과 새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수염을 기를 수 있다면, 그는 에드거 앨런 포를 연기하고 싶어한다.
그럼에도, 내가 그를 만났을 때, 그는 그의 캐릭터를 부수고 활짝 웃어보였다. 그리고 나를 껴안은 뒤, 그가 빠져 있었던 "hope tree(소망나무)"로 나를 이끌었다. 그것은 공공예술 프로젝트로 꾸며진 진짜 기둥이었고, 거기에는 보행자들의 소망이 적힌 밝은 오렌지 색과 노란색의 택이 잔뜩 걸려있었다. 밀러는 그를 가장 기쁘게 했던 것 하나를 큰 소리로 읽었다: "나는 키가 크고, 아이들을 갖고 싶어하고, 창의적이고, 다정한 남자이면서, 우아하고, 유머러스하고, 섹시하고 따뜻한 남자가 되고 싶어요. 또 그 남자에게는 미국 아메리칸의 여권이 필요하고, 다음 주 내로 결혼하고 싶어 한다는 것도 중요한 점이에요." 밀러는 지난 번에 그가 소망나무를 찾았을 때 그가 적었던 택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아마 역사 속에서 우리 몸이 차지할 부분에 대한 것이었어요. 전 우리 모두가 일반적인 전제에 맞춰서 행동하길 바랐어요."라고 말한다. 무슨 "몸"을 말하는 거예요? 그가 설명했다: "처음에는 물리적인 육체였는데, 이젠 감정적인 육체 같은 것도 모두요. ."
아직도 나는 그가 한 말을 잘 모르겠지만, 밀러는 어쩌면 심오하게 들릴 수도 있는 완전히 여물지 않은 숙고를 토해내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그가 우리의 미팅 장소를 '더 하이 레인'으로 정한 것은 그가 담배를 피고 싶어했을 뿐 아니라, 그에 따르면, 이런 이유이기도 했다. "저는 제가 왜 하이라인에 관심을 갖는지, 그리고 거기다 왜 이것이 사람들에게 매력적인지에 관심이 있어요. 글쎄요, 이건 우리의 격동기를 표현하는 분명한 미래 같아요. 기찻길에 무성하게 자란 잡초가 있는 종말기의 자연처럼요." 이 잡초들은 정원사가 심었다는 건 무시해라. 우리는 Tenth Avenue가 멀리 보이는 작은 원형극장을 발견할 때까지 주위를 거닐었다. ("여기예요!" 그가 말했다. "여기에 연극 같은 삶이 있어요.") 그리고 그가 가져온 번트 오렌지 색의 빈티지 플라스틱 보온병에 담긴 차이 티를 마셨다.
영화에서, 밀러는 종종 영악하고 못된 아들로 캐스팅 되어왔다. 그는 '시티 아일랜드'에서는 앤디 가르시아와 줄리아나 마굴리스의 아들이자 비만 페티쉬를 가진 아이를, '어나더 해피 데이'에서는 엘렌 바킨의 건방지고 허무주의에 빠진 마약중독소년을 연기했다. 그는 샘 레빈슨 감독을 만날 때 늦게 나타나서는, 자기가 담배를 피워야하니 밖에 앉자고 얘기해서 그 역을 따냈다. (" '존나 또라이다! 얘가 이 영화에 딱이야!"라고 생각했었어요." 그 때 레빈슨은 이렇게 말했다.) 최근에는 틸다 스윈튼과 함께한 '케빈'에서, 밀러는 콜럼바인 같은 집단 살인을 저지르는, 몇 발짝 더 나아간 문제 청소년 유형을 연기했다.
일을 하지 않을 때, 그는 네오 히피다. '월가 시위'와 '버닝맨 축제'를 방문하고, 종종 셔츠를 입지 않은 채로 rootsy rock 밴드인 Sons of an Illustrious Father에서 드럼을 친다. 그 이름은 플라톤의 <국가론(republic)>에 나오는 "더러운 경제적 불평등의 시대에, 저명한 아버지(an illustrious father)로 등장하여 특권을 누리는 것에 대한 내재적 고통"에서 따온 것이라고 밀러가 말했다.
그의 아버지인 로버트 S. 밀러는 워크맨 출판사의 출판부장이다. 밀러는 두 명의 누나와 함께 뉴저지에서 자랐다; 그의 어머니, 마르타는 무용수이다. 그들은 "내가 지낼 수 있는 모든 곳만큼", 밀러가 지내고 있는 첼시에 자리를 잡고 있다.
8살 때, 밀러는 링컨 센터에서, 로버트 윌슨과 필립 글래스가 협연하는 White Raven으로 포르투칼 탐험가 바스코 다가마에 대해 공연했다. 그 파트 덕분에 에즈라는 "공중에 300피트나!" 들어올려졌다. (사실은 뉴욕 주립 극장의 천장 높이는 40피트를 조금 넘는다.) 그가 말하길 거기서, "저는 오케스트라였어요. 웅장하고 강렬한 제스춰 하나로, 저는 태양까지 떠올랐어요. 그건 아마 8살이 받을 수 있는 가장 심오한 ego boost였어요." 그러고 나서 그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어린이 합창단에 들어갔다. 사춘기가 들이닥쳐 지쳐버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렇게 그는 연기를 시작했다.
14살, 그의 첫 영화 캐릭터는 '애프터스쿨'의 주연이었다. 그 캐릭터는 마약 중독으로 마비된 채 죽어가는 쌍둥이 자매를 촬영하고, 목이 졸리는 여자가 나오는 인터넷 포르노를 보며 자위를 하는 보딩 스쿨 아웃캐스트였다. 안토니오 캠포스 감독은 말했다. "그냥 그는 특별했었다고 말할 수 있어요. 훨씬 더 영리했어요." 다른 10대 배우들보다(그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시계태엽 오렌지'와 비슷했다). 그리고 "더 센스티브 했어요. 그는 그 스스로를 멍청하게 만드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죠."
그는 또한 버진도 아니었다; 캠포스는 섹스 씬에서 밀러가 서투르게 연기하도록 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담배도 이미 피고 있었다. "저기요, 전 그 때 모든 걸 폈다고요!"라고 밀러가 말했다. "마른 바나나, 알죠? 오렌지 껍질, 기본적으로 태울 수 있는 건 모조리요. 차도 마시는 데 쓰지 않았었어요."
좋은 학생이었지만, 밀러는 호보켄의 허드슨 스쿨을 3학년 때 자퇴했다. 지하철에서 낙심한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 그를 찾아온 꿈 때문이었다. "그는 울고 있었어요. 그리고는 '내가 쓴 4개의 심포니가 다 안 좋아. 그냥, 그것들은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아.'라고 말했죠. 그리고 제가 '당신은 5개 더 쓸 거예요! 계속 하세요! (역: 베토벤은 심포니를 총 9개 썼지요~)라고 했죠. 그리고 식은 땀과 함께 깼어요. 그리고 전 '학교를 그만 둬야겠어.'라고 느꼈죠." 어떤 생각이었을까? "전 그게 모든 예술가들이 희생을 하고, 겉으로 보기에 이성적이지 않은 결정을 내릴 의무가 얼마나 있는지에 대한 거라고 생각해요. 모두가 오랫동안 쌓아온 예술 왕국 같이 중요한 일에 깔린 몇 안 되는 자갈들을 헤쳐나가기 위해서 말이에요."
별로 놀랍지 않겠지만, 그런 꿈과 가벼운 숙고를 가진 밀러는 6월, 인기있는 청소년 소설을 각색하여, 그가 엠마왓슨의 게이 남매로 나오는 '월플라워'를 촬영하던 도중 마리화나 소유로 체포되었다. 그는 "대마가 흩뿌러져 저를 퀼트처럼 덮고 있었다"고 얘기했지만, "친절한 치안 판사" 덕분에 그는 풀려났다. 그 판사는 그에게 경범죄라는 두 번의 판결을 내렸고, "우리 영화의 어린 엑스트라들에게 내가 끼칠 영향에 관련된 긴 강의를 듣게 했어요. 나중에 그가 밝히길, 그 엑스트라들 중 하나가 그의 딸이었어요."
밀러는 잘못하지 않았다고 느끼고 있다. "내가 대마를 폈다는 걸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이건 감각을 더 잘 느끼게 해주는 무해한 허브 물질이에요."
그는 편하게 성장한 것은 아니었지만, 밀러의 부모님은 특별한 지지를 보내왔다. 그것이 그가 케빈을 촬영하는 내내 그의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 이유다. "제 마음이 케빈을 벗어날 수 있던 순간에, 저희 어머니가 올바르게 해왔던 모든 것들에 대한 감사함이 커지고 모아지는 것처럼 느꼈어요."라고 그가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와의 애정 어리고, 서로를 이해하는 그 관계를 제 머릿속 앞에 도로 돌려놓는 건 저나, 그 영화에 아주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었죠. 그래서 어머니가, 어, 알맞은 거리를 두셨던 것이 정말 당연했어요." 칸에서 '케빈'이 첫 상영될 때, 그의 어머니는 그녀 아들의 얼굴을 한 킬러를 보기 위해 그의 옆에 앉았다. "그렇게 우시는 건 한번도 들어본 적 없었어요."라고 그가 말했다. "다 들릴 정도로 흐느끼고 떠시더라고요."
우리의 방랑은 구부정하게 앉아있었던 것, 아니면 밀러가 말했던 것처럼 "가장 무해한 작은 게으름"을 지나 Matthew Mark 갤러리의 Nan Goldin 전시, 그리고 우리가 시작했던 곳의 끝, 다시 소망 나무로 우리를 이끌었다. 밀러는 새로운 소망을 하나 걸었다. "내 소망을 언제나 알고 있기 위해서, 나의 파트를 항상 연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는 그것을 설명하려고 했지만 결국 그러지 않았다. 만약 그가 그렇게 했다면 얼마간은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전에 다른 인터뷰 기사에 붙였던 화본데 원래는 이 기사 것이었다..!